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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김시습을 찾아서⑪
[기획연재] 꿈꾸다 죽은 늙은이-김시습을 찾아서⑪
  • 소종섭
  • 승인 2014.10.08 09: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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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펼 기대를 안고 서울로 상경하다
1493년 매월당 김시습은 부여 무량사에서 59세로 생을 마쳤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인 그의 면모는 사상가, 철학가, 종교인, 문학가, 여행가 등 실로 다양하다. 유교에 바탕을 두었으면서도 불문에 귀의에 <십현담요해> <화엄석제> 등 불교와 관련해 많은 수준 높은 저술을 남겼다. 도교에도 정통한 그는 ‘한국 도교의 鼻祖’로 불린다. 전국을 유람하면서 남긴 시가 남아 있는 것만 2,200수가 넘는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와 ‘애민의’‘인군의’ 등 많은 수필도 남겼다. 홍유손은 선생을 기리며 쓴 제문에서 ‘기암괴석과 이름난 물은 공께서 감상하신 뒤에야 비로소 빛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전국 팔도에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김시습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놀고먹는 이들을 경멸하며 노동의 신성함을 예찬했다. 자리만 누리는 권력자들을 조롱하며 “어떻게 저런 인물이 자리를 맡았나” 하고 한탄했다. 역사 속에서 지조와 광기의 천재로 상징화 된 그는 자유인이며 비판자, 동시에 왕도정치가 구현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던 이상가였다. 선생은 스스로를 ‘夢死老’ 즉,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착안해 <꿈꾸다 죽은 늙은이- 김시습을 찾아서>라는 기획연재의 제목을 따왔다. 과거 속에서 현재를 돌아보는 인문기행이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린다.

수락산에 터 잡고 수많은 시, 수필, 논문 지어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에 세워져 있는 김시습의 동상과 시비. 21c부여신문

김시습이 경주 금오산(남산)에서 생활한 지 6년 되던 1469년 겨울, 성종이 즉위했다.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던 세조는 그 전 해인 1468년 9월, 재위 1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52세였다. 세조가 죽은 뒤 둘째 아들인 광(胱, 예종)이 임금이 되었으나 불과 1년 2개월 만인 1469년 11월, 29세로 세상을 떴다.

그런 뒤 즉위한 임금이 성종이다. 예종의 아들이 4살에 불과해 세조의 장남인 덕종의 두 아들 가운데 차남이 왕위를 차지했다. 그때 성종의 나이는 13살이었다. 세조의 왕비 정희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기는 했으나 어쨌든 새 임금이 즉위했으니 세상이 바뀌었다. 당시 김시습의 나이 37세였다.

김시습은 1471년 봄 서울로 왔다. 39세 때였다. 서울과 서울 부근을 오가던 김시습은 1472년 가을 수락산 폭천 부근에 터를 잡았다. 1473년 봄에 적은 <탕유금오록> 후지에서 김시습은 “신묘년 봄에 누군가의 청으로 서울에 들어왔다가 임진년 가을에 성동 폭천정사에 은둔해서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일생을 마치려 했다”라고 썼다.

김시습이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진 수락산 내원암. 21c부여신문

김시습이 머물던 폭천정사는 지금의 수락산 내원암 부근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속한다. 내원암 부근에는 금류폭포와 은류폭포가 있는데 김시습은 이 폭포들에 착안해 ‘폭천정사’라는 이름을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류폭포 옆에 이곳이 매월당 김시습이 은거했던 곳이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숙종 때 인물로 <색경>을 쓴 박세당(1629-1703)에 따르면 수락산 동쪽에 매월당이 머물던 터가 있고 그 근처에 흥국사와 은선암이 있었다고 한다. 박세당과 비슷한 시기 노론계 문인인 이희조(1655-1724)가 남긴 <수락산에 노닌 기록(遊水落山記)> 첫머리에서 이렇게 썼다.

수락산은 옥류동이 가장 빼어나다. 옥류동은 매월당 김시습이 이름 붙인 것이다. 가다가 산 중턱에 이르니 또 윗폭포가 있어 이름이 금류라고 하는데, 더욱 기이하고 장대하여 볼 만하다. 그리고 그 가장 높은 봉우리에 매월당의 옛 터가 남아 있다.

현재 수락산 만장봉에는 매월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지금은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된 이노근 의원이 노원구청장 시절 세운 정자이다. 김시습은 만장봉을 동봉이라 부르며 자신의 호를 동봉으로 쓰기도 했다. 정자 부근에는 김시습 선생이 지은 시들을 등산객들이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수락산에는 ‘김시습길’도 있다. 노원구 역사문화 거리에는 김시습의 동상과 시비도 세워져 있다.

서울시 노원구는 김시습과 관련해 가장 스토리텔링을 가장 많이 한 지방자치단체이다. 강원도 강릉에는 김시습 기념관이 있으나 별다른 역할을 못하고 있고, 김시습 선생이 생을 마친 곳이며 승탑과 자화상이 있는 부여는 별 관심이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김시습은 경주 금오산을 떠나 서울로 와 한동안 수락산에서 생활했다. 21c부여신문

김시습은 경주 금오산에 머물다 서울로 상경한 것과 관련해 훗날 강원도 양양에 머물 때 양양부사로 있던 유자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새 왕이 등극하여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좋은 의견들을 들어준다고 하기에 속으로 벼슬이라도 해 볼까 한 적이 있었다.”

김시습은 자신이 꿈꾼 왕도정치의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현실은 냉혹했다. 누구도 혹시 자신에게 해가 될까봐 지조와 광기로 무장한 이 천재 지식인에게 길을 열어주려 하지 않았다.

서울로 온 김시습은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만나거나 서신을 보냈다. 어려서 이웃에 살았고 당시 평안북도 절도사로 있던 어유소(1434-1489)에게 13수의 시를 부쳤다. 성균관 시절에 형님 동생했던 고태필에게는 화원의 꽃을 재배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대제학으로 있던 서거정과도 교유했다. 그러나 누구도 김시습을 천거하지 않았다.

기대했던 정치권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정창손과 노사신 등 훈구파가 여전히 위세를 떨쳤다. 무언가 세상의 변화를 기대했던 김시습은 서서히 좌절하기 시작했다. 이 즈음에 쓴 시가 ‘도연명이 옛 집에 돌아가서 쓴 시에 화운함-꿈에 산방에 이르다’이다. 꿈에 금오산실을 볼 정도로 경주 금오산이 그리워진 것이다.

어젯밤에 금오산 꿈을 꾸었는데
산새들이 울며 돌아오라 재촉하더라.
산방에는 책들이 가지런하였지
너무도 기뻐하다가 그 끝에 슬프더라.

‘옛 산이 그립다’는 시도 지었다.

경기에 발 멈춘 지 서너 해건만
여전히 꿈 속에선 옛 산으로 돌아가네.
금오산 천 겹 봉우리에 구름 걷히고
파도 그친 바다에 한 조각 배 떠 있으리.
매화 꽃봉오리 눈앞에 삼삼하고
창맡 파초의 빗방울 소리 들리는 듯.
봄 들어 죽순과 고비 우쑥 자란 때
용당 영령(금오산 산신령)은 나 돌아오길 기다리리.

내원암 금류폭포 위에는 이곳에서 김시습이 머물렀다는 내용의 안내문이 있다. 21c부여신문

제자 선행, 계담과 함께 수락산에 머물던 시기에 김시습은 자신의 논지를 담은 논설적인 수필들을 썼다. ‘고금제왕국가흥망론’ ‘정치는 삼대를 본받아야 한다’ 같은 글들은 그의 정치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김시습은 정치의 본령은 애민(愛民)과 덕치(德治)라고 보았다. ‘백성을 사랑하는 이치에 대하여(愛民義)’라는 글에서 그는 이상적인 정치는 어진 정치(仁政)라고 했다.

민심에 귀의하여 따르면 만세가 흐르도록 군주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민심이 떠나서 흩어지면, 하루 저녁도 안 되어 아무도 복종하지 않는 한낱 필부가 되고 만다. 군주와 필부 사이는 머리카락 하나보다 더 미세한 차이로 격해 있을 뿐이니,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으라? 그러므로 곡물 창고와 재물 창고는 백성의 몸이요, 의상과 모자와 신발은 백성의 가죽이요, 술과 음식과 반찬은 백성의 기름이요, 궁궐과 수레는 백성의 노동으로 얻은 것이다.
(중략)
군주가 나라를 다스릴 때는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백성을 사랑하는 방법이란 이른바 ‘어진 정치’일 따름이다.

김시습은 ‘어진 정치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각자 생업에 힘쓰도록 권장하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김시습은 삶의 본질을 노동에서 찾았고 자신 스스로도 노동했다. “성동에다 밭이랑을 빌려 콩과 조를 심어 수확하였다. 벼슬 구하지 않고 노동을 한다. 서리 내린 가을에 토란을 후원에서 거둘 때, 가을 국화가 앞뜰에 가득하다. 땔나무 주우며 산길을 지나고, 차조기 뜯으며 새 밭을 찾는다” 같은 글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김시습의 모습은 도연명과 닮은 점이 있다. 현실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얽매이는 것과 아부를 싫어하며 체험시를 많이 썼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닮았다. 김시습은 도연명의 시를 좋아하여 그와 화답하는 시를 66수나 지었다. 김시습은 도연명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김시습은 치악산에 머물 때는 화전을 일구었고, 금오산에서는 봄 밭을 가꾸었다. 그는 부유한 사람들이 남에게 베풀지 못하고 인색하게 구는 것을 뱀과 전갈처럼 여겼다. 수락산 시절 김시습은 목각에 취미를 붙였다. 주로 일하는 농부의 형상을 만들었다.

수락산에 머물 때 김시습의 벗은 흰 구름이었다. 그는 흰 구름을 통해 세상을 벗어난 깨끗한 정신세계의 상징으로 보았다. ‘잠깐 갰다가 잠깐 오는 비’라는 시는 이러한 그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갰다 싶더니 또 비가 오니
하늘의 움직임도 그러하거니 세태야 어떠하랴.
나를 칭찬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나를 헐뜯고
명예를 피하는 척하다가 명예를 구하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봄이 어찌 다스리며
구름 가고 구름 오는 것을 산이 어찌 다투겠는가.
사람들에게 말하나니, 부디 기억해두오
예기 말고 평생 어디서도 즐거울 수 없다는 것을.

박세당이 김시습을 추모하며 지었던 청풍정.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 21c부여신문

김시습은 이 시기 역사 속에서 절의를 지켰거나 어질다고 추앙받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찬(贊)과 전(傳)을 지었다. 백이 숙제, 초나라 굴원, 한나라 장량, 송나라 악비, 촉한 제갈량 등이었다. 인물전의 대상은 주돈이, 제갈량, 정호, 악비 등이었다.

김시습은 승복을 입었지만 불교나 유교, 도교 가운데 어느 하나가 절대 진리를 구현한다고 보지 않았다. 그에게 각각은 부분적인 의미 밖에 지니지 않았다. 수락산 시절 김시습은 유교적인 관점에서 불교의 근본 교리를 긍정하면서 군주의 지나친 호불과 과도한 불사를 배격했다.

예를 들면 <위주(魏主)>에서 “부처의 가르침은 안민제중(安民濟衆·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구제하는 것)에 있다”고 썼다. 김시습은 이 시기에 여러 승려들과 교유했다. 특히 춘천 소양강가에 초가를 두고 있던 학매와 가까웠다. <매월당선생전>을 쓴 윤춘년은 김시습의 제자 승려로 도의와 학매를 꼽았다. 김시습이 늦가을에 춘천으로 가는 학매에게 준 송별시가 전한다.

우두산 아래 물이 갓 불어나
나룻배는 바람에 잎새처럼 날리리
화악산과 청평산은 몇 길이나 높을까.
공중에서 푸른 물을 떨구어 나그네의 옷 적시리.

김시습은 또 당시 정치에서 소외되어 있으면서 자유를 추구했던 인사들과 교유했다. 유생 남효온, 종실 이정은, 아전 출신 홍유손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남효온이 김시습과 주고 받은 서신을 보면 남효온은 김시습을 ‘불교를 좋아하지 않는 선사’‘도경에 심취한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남효온의 평이 아니어도 김시습은 ‘한국 도교의 조상’으로 불린다. <수진> <복기> <용호> 등 세 편을 지어 도교적 양생술을 논했다. 금단을 수행하면서 <참동계>를 연구함으로써 수련도교의 맥을 형성했다. 이 때문인지 김시습은 <해동전도록>에서 도맥의 주요 인물로 등장했다.

김시습은 수락산 시절 거실 북쪽 벽에 <북명(北銘)>이라는 글을 걸어놓고 생활했다.

쪽박 물과 찬밥을 먹을지언정 자리 차지하곤 공밥 먹지 말며
한 그릇 밥 받으면 걸맞는 힘을 써서 의리에 맞아야 하리.
하루 닥칠 근심보다는 종신 근심할 일 근심하고
파리함을 괘념치 말고 뜻 바꾸지 않는 즐거움을 즐겨야 하리.
(중략)
부디 그대는 반성하여
북쪽 벽에서 느끼시라.

수락산 시절 뜻을 펴지 못하고 흰 구름과 산마루에 걸린 달을 벗 삼아 지냈던 김시습. 시간이 갈수록 그는 이곳이 자신이 더 이상 머물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가 다시 길을 떠난 곳은 관동이다. 그의 삶은 말년을 향해 가고 있다.

[참고] <김시습 평전> 심경호
<김시습과 떠나는 조선시대 국토기행> 김재웅
<매월당 김시습> 이문구
<매월당 김시습> 이종호
<길 위의 노래> 정길수 편역
<금오신화> 김경미 옮김

ㄴ 21c부여신문

소 종 섭
외산 출생, 부여고-고려대 졸업
전) 시사저널 편집국장
현)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회장
현) 인포마스터 사회적전략센터장
저서 <백제의 혼 부여의 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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